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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전거여행

제주 자전거 일주 2일차 (대정 - 성산, 24/5/15)

by wandererj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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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역시 화창한 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출근을 하셨는지 인기척이 없어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부처님 오신 날 휴일인데도 바쁘게 지내시는 열혈 사이클리스트 사장님이 오랫동안 인상에 남을 것 같다.
 


어제는 저녁이라 오가면서 보지 못했던 표지판을 읽어보니 슬픈 역사의 상처를 가진 장소가 숙소 바로 옆에 있었다. 머물렀던 동네 이름이 대정읍 신도리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정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달리는 바닷가에는 돌고래를 볼 수 있다는 표지판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가민 속도계에만 시선을 둔 채 달리다가 돌고래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다 싶어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달렸다. 하지만 운이 없는 날인지 발길을 잡은 물속의 검은 형체들은 대부분 바윗돌이거나 해초, 아니면 그냥 그림자였다.
 


하멜일행이 표류했던 곳을 기리는 표지석 앞에서 오래전에 크로아티아 스플릿에서 마르코폴로의 고향인 코르출라 섬으로 가던 배에서 본 돌고래 떼가 생각났다. 갑판 위에 아무도 없어서 감흥을 나눌 새도 없이 잠깐 재주를 부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휴일이라 관광객을 실은 버스와 렌터카 번호판을 단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제주도 일주 자전거길에서 반드시 끊어지지 않는 전용도로 표시를 만들겠다는 관청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동네 상가 앞 당연히 자동차가 주차할 수밖에 없는 곳, 버스 정류장 의자 바로 옆이라 누구라도 앉아있다가 자전거로 지나가면 시비가 걸릴 것 같은 곳에도 파란색 표시가 이어져 있었다.
 
어쨌든 길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를 막고 주차해 놓은 익명의 차량 운전자에게 괜한 악감정이 솟아오르게도 했다. 표시되어 있는 자전거길을 고집하지 않고 너그럽게, 적당하게 라이딩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산방산 근처 오르막을 오르는데 시간을 보내고 초입에 있는 유명한 돈가츠 집에 대기하고 있는 긴 줄을 지나니 금방 서귀포 시내였다. 특별히  용무가 없어 그대로 통과해 달렸다. 서귀포부터는 자전거를 타는 다른 여행자를 여러 명 지나쳤다. 단단히 채비를 갖춘 외국인 라이더와 피팅이 맞지 않아 힘들어 보이는 여성 자전거 여행자 그룹도 보였다.
 
길가에 한산해 보이는 식당에서 한치가 들어간 펄펄 끓는 콩나물 국밥을 먹고, 오래전부터 인스타그램으로만 보던 식물 카페를 찾아 나섰다. 네비를 따라 갑작스러운 오르막을 라이딩해서 동네 안쪽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호젓하게 식물을 구경하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어 공간이 주는 고요함을 오롯하게 누릴 수 있었다.
 


다시 출발해 성산까지는 올레길 구간과 겹쳐있어 심심치않게 도보 여행자 그룹을 지나쳤다. 햇볕이 강한 날이었는데 대부분 검은색 계통의 옷차림을 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곳곳에 있는 표지판도 빼놓지 않고 내용을 읽어 보았다. 대부분 마을에 내려오는 설화이거나 우물, 빨래터, 적을 감시 전망대로 사용되었던 장소에 관한 설명이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보았던 민간인 희생에 관한 표지만은 없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없었는지, 아니면 표지판으로 알릴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멀리서 보이는 성산 일출봉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다음날 제주항에서 여수로 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는데 제대로 출항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중국인 관광객이 점령한 일출봉 주변은 지난해 왔을 때보다 더 상점도 많아지고 멀끔한 인상이었다.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했지만 맞바람이 더욱 거세져서 근처에 있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라이딩을 멈췄다. 어제처럼 도미토리 숙소에는 다른 숙박객은 아무도 없었다.
 
관광지답게 혼자 식사를 할만한 식당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냥 들어간 <칼국수 연구소>란 식당에서 좋아하는 심심한 스타일의 칼국수와 맥주를 마셨다.
 


바람 때문에 한산해진 일출봉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성진 시인의 시비 옆에서 산티아고까지의 거리와 Flecha Amarilla(노란 화살표)가 새겨진 순례길 표지석을 발견했다. 순례자 카페에서 제주에 설치된다는 소식을 본 것 같은데, 우연히 발견해서 더 반가웠다. 지난해 여름에 은의 길과 포르투갈 길 여행에서 수없이 길잡이를 해준 표지석 옆에서 한참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아무도 없는 숙소의 창문은 좀 낡았는지 밤새 바람에 덜그럭거렸다. 어쩔 수 없이 불면을 감내하며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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